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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이 일본의 통치를 따르지 않으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연재] 김태수 전 안성3.1운동기념관장 편찬 ‘신문조서에 의한 안성4.1독립항쟁, 2일간 해방사’ ②

기사입력 2021-03-13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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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수 전 안성3.1운동기념관장

[편집자 주] 일제강점기 민족의 독립을 위해 전국에서 일어났던 3.1만세운동에서 안성군 원곡면·양성면은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과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과 함께 만세운동의 목적인 독립을 위해 무력을 동반해 치열하게 저항했던 3대 실력 항쟁지 중 한 곳이다. 그리고 그 항쟁을 통해 일제강점기 전국에서 유일하게 191941일과 2일 일제를 완전히 몰아내고 해방을 쟁취해낸 곳이 안성 원곡·양성면 3.1만세 운동이었고, 그 원곡·양성 만세 운동을 포함해 안성 곳곳에서 들불처럼 일어나 일제에 저항했던 것이 안성3.1운동이다.

당시 일제를 몰아내고 2일간의 해방을 쟁취했던 원곡·양성 지역의 만세운동 비롯해 독립을 위해 안성의 3.1운동에 참여한 민중은 연인원 6,000명에서 8,500명이 달한다. 이는 1920년경 안성군 인구가 7만 명 내외였던 것을 감안하면 최소 1/10에 달하는 인원이 만세시위에 참여한 것이다. 특히, 원곡·양성 지역의 3.1운동은 2,000여 명이 참여했는데, 이는 당시 원곡·양성지역의 어린아이와 노인, 아녀자들을 제외하면 모든 민중이 참여한 것이다.

그러나 치열했던 만세운동과 안성만의 2일간 해방 쟁취로 일제로부터 핍박으로 이어졌고, 130명이 넘는 참여자들이 실형을 선고받아야 했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3.1운동사 최대규모의 탄압이었다. 이에 당신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의 자손이기도 한 김태수 전 안성3.1운동기념관장이 일제가 만세운동 참여자를 핍박하고 탄압하기 위해 만든 신문조서(訊問詔書) 기록을 중심으로 <안성4.1독립항쟁, 2일간 해방사>를 발간하고 게재를 위해 본지에 보내와 이를 연재한다.


2. <국내의 상황과 식민통치>

1910년대의 우리나라(조선)의 상황은 한마디로 혼란이 극에 달한 시대였다. 1895년 조선의 황후 민비(閔妃)가 궁궐에서 시해(弑害)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하였는가 하면 1905년 러일전쟁 후 일제는 을사보호조약이라는 이름의 늑약(勒約)을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찬탈하였고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이 터지자 고종이 폐위되고 군대가 해산되는 엄청난 회오리가 조선을 강타한다. 1910822일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이며 대표적인 친일매국노 이완용과 일제의 초대 총독이었던 데라우찌 마사다께 사이에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었고, 829일 공포되어 결국은 한일병탄의 극악한 치욕의 역사를 이루고야만 일제는 자국의 실업자나 불량인 들을 대거 데려와 각종 특혜와 특권으로 이 나라의 지배자로 삼아 삼천리강토를 유린하기 시작하고 폭정과 수탈로 민초는 한없는 고통 속에 나라 잃은 실국민(失國民)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이리하여 반만년 역사의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던 동양의 선비 나라 조선은 죽었고, 조선은 지구상에서 소멸되고 만다. 치욕스러운 날 1910829일에 일제는 경복궁 근정전에 일장기를 계양하고 식민 지배를 시작하였으며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무단통치를 자행한다.

조선총독부 초대 총리 데라우찌 마사다께는 당시 취임사에서 조선인이 일본의 통치를 따르지 않으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어마어마한 발언으로 조선인을 협박하면서 총, 칼을 앞세운 무력에 의한 통치를 예고한다.

총독은 조선의 행정, 입법, 사법권을 장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대 통솔권까지 행사하므로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절대권자로서 총독부의 주요 고위관리는 대부분 일본인이 차지하였고 조선인에게는 하위직 말단직이나 보조원으로 만 쓰는 등 심한 차별을 시작한다. 일제는 조선인을 정치에 참여 시킨다는 명분으로 총독부 직속 자문기구로 중추원(中樞院)이라는 친일기관을 설치하였으나 말이 참여이지 허수아비 기구였고 게다가 대부분 자리를 친일인사로 충원하여 일종의 친일파 매직(賣職)기구로서 오히려 조선인의 원성을 산다.

일제는 1910년대 조선을 병탄(倂呑)하고 지배하면서 무단통치를 강행한다. 치안을 확보한다는 구실로 전국 곳곳에 경찰관서와 현병기관을 설치하고 헌병경찰제를 시행하여 헌병이 경찰업무를 지휘하고 일반 경찰업무까지 관여하였다. 이 들은 본래의 치안업무 외에 각종 조선인의 독립운동 첩보를 수집하여 의병, 광복군, 3.1운동 애국지사, 열혈지사 등 독립운동 애국지사들을 체포, 구금하는 등 심하게 핍박하고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몹쓸 짓을 자행한다.

이들에겐 막강한 권한이 주어졌으니 즉결처분권이다. 즉결처분권은 헌병경찰이 재판권과 수사권, 처벌권을 모두 갖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태형령이 1912년 선포되어 조선인은 조금만 수상한 모습을 보여도 어김없이 잡아다가 마음대로 매를 때렸으며 이는 지극히 조선인을 얕보는 치졸한 수작으로 당시 일본에서는 이미 근대화가 이루어져서 인권이 중시되어 태형제도를 폐지한 상태인데 식민지 조선인은 미개하여 매로 다스려야 한다는 얄팍한 민족차별성 우월주의를 앞세워 웃지 못할 촌극을 연출하였던 것이다.

일제는 또 1911년제1차 교육령을 선포하고 교육에도 차별을 가하여 일본인들에게는 소학과정 6년을 두고 조선인에게는 4년의 보통학교 과정을 이수케 하였으며 무단통치를 통하여 교사까지 제복을 입고 칼을 차게 하였다. 특히 일제는 교육 차별화를 통하여 식민지교육을 강제하므로 조선인 우민화(愚民化)에 박차를 가했으니 <식민지 근대화론>이 무색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 외에도 일본은 강압적인 통치를 위하여 우리의 기본권인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철저히 통제하였으니 민족의 입과 귀를 막기 위하여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애국신문과 역사책, 그리고 잡지의 출판을 금지하였고 대한협회 등 애국계몽단체도 해산시켰다.

그리고 일제는 식민통치의 기초자료를 확보하기 위하여 1912년에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으니 그들의 허울 좋은 구호는 조세부담의 공평과 근대적 토지소유권의 확립이라고 그럴싸하게 포장하였으나 실제는 식민통치에 필요한 재정기반인 지세(地稅)부과대상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토지를 약탈하기 위하여 매매와 저당을 자유롭게 하여 일본인이 손쉽게 토지에 투자할 수 있게 하려는 얄팍한 속임수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대한제국 황실소유지인 궁방전(宮房田)과 관유지인 역둔토(驛屯土), 그리고 마을이나 문중의 공유지로 특정소유자가 없는 토지를 몰수하여 대한제국 농지 1/3을 갈취하고 동양척식회사를 설립하여 토지수탈의 악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1918년까지 토지조사사업은 계속되었고 결과적으로 총독부의 지세수입은 크게 증가한 반면 경작농민들은 이런저런 과정을 통하여 토지도 잃고 권리도 잃는 등 크게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일제는 191012월에 한국인 기업의 설립을 막고 일본기업의 한국진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회사령을 공포하고 기업 활동도 통제하기 시작하였으며 회사 허가제를 실시하였고 회사가 일제의 비위를 건드리면 지체 없이 폐쇄하는 등 조선의 민족자본이 성장하는 것을 철저히 억제하였으며 1919년에 조선인이 만든 회사는 63개에 불과한데 일본인 회사는 289개나 되어 당시의 실태를 너무나도 잘 알게 하고 있다. 이외에도 많은 법이나 칙령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인을 옥죄이는 제도를 시행하고 지능적이고 악랄하게 차별화와 수탈을 감행하였고 특히 식민지배 초기에는 무단통치를 통하여 엄청난 핍박을 가하여 조선인의 울분을 크게 사게 되었다.

 

 

자치안성신문 (news6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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