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최종편집일 2021-04-22 17:25

  • 뉴스 > 문화/예술

일제의 무력진압에도 불구하고 200만 민족이 일어난 거국적 민중운동

[연재] 김태수 전 안성3.1운동기념관장 편찬 ‘신문조서에 의한 안성4.1독립항쟁, 2일간 해방사’ - 5

기사입력 2021-03-31 22:21

페이스북으로 공유 트위터로 공유 카카오 스토리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문자로 공유 밴드로 공유

[편집자 주] 일제강점기 민족의 독립을 위해 전국에서 일어났던 3.1만세운동에서 안성군 원곡면·양성면은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과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과 함께 만세운동의 목적인 독립을 위해 무력을 동반해 치열하게 저항했던 3대 실력 항쟁지 중 한 곳이다. 그리고 그 항쟁을 통해 일제강점기 전국에서 유일하게 191941일과 2일 일제를 완전히 몰아내고 해방을 쟁취해낸 곳이 안성 원곡·양성면 3.1만세 운동이었고, 그 원곡·양성 만세 운동을 포함해 안성 곳곳에서 들불처럼 일어나 일제에 저항했던 것이 안성3.1운동이다.

당시 일제를 몰아내고 2일간의 해방을 쟁취했던 원곡·양성 지역의 만세운동 비롯해 독립을 위해 안성의 3.1운동에 참여한 민중은 연인원 6,000명에서 8,500명이 달한다. 이는 1920년경 안성군 인구가 7만 명 내외였던 것을 감안하면 최소 1/10에 달하는 인원이 만세시위에 참여한 것이다. 특히, 원곡·양성 지역의 3.1운동은 2,000여 명이 참여했는데, 이는 당시 원곡·양성지역의 어린아이와 노인, 아녀자들을 제외하면 모든 민중이 참여한 것이다.

그러나 치열했던 만세운동과 안성만의 2일간 해방 쟁취로 일제로부터 핍박으로 이어졌고, 130명이 넘는 참여자들이 실형을 선고받아야 했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3.1운동사 최대규모의 탄압이었다. 이에 당신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의 자손이기도 한 김태수 전 안성3.1운동기념관장이 일제가 만세운동 참여자를 핍박하고 탄압하기 위해 만든 신문조서(訊問詔書) 기록을 중심으로 <안성4.1독립항쟁, 2일간 해방사>를 발간하고 게재를 위해 본지에 보내와 이를 연재한다.
 


김태수 전 안성3.1운동기념관장, 안성4.1독립항쟁기념사업회장

4. <3.1 운동>

난세의 황제로서 기울어가는 조선의 비운의 왕 고종은 1919121일 오전 145분 한 많은 일생을 마친다. 그런데 일제는 사망 이틀 후인 123일 고종의 사망시각을 122일 오전 6시로 발표하였다. 그러자 고종의 독살설(毒殺說)이 제기되었고 결국 황제의 인산(因山)일은 33일 월요일로 결정을 하였다. 고종의 독살설에 조선민중들의 울분은 극에 달했다. 9년 동안 당한 핍박에 그동안 축적돼온 한과 울분이 고종의 승하(承遐)로 인하여 봇물처럼 터져 나왔으니 바로 3.1 독립운동인 것이다. 거사일이 31일로 정해진 것은 33일 고종황제 인산일에 거사를 하게 되면 장례를 방해하게 되고 32일은 일요일이기 때문에 민족대표 중 기독교 신자들의 반대로 인하여 31일로 정했다고 한다.

모든 민중의 시선이 고종의 장례식에 쏠려 있는 상황에서 민족지도자들은 장례 이틀 전인 31일을 택하여 거국적인 독립선언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민족대표들은 31일 오후2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되면서 대규모 만세시위로 인한 폭력화로 유혈사태를 우려한 민족대표들은 조선이 독립을 원한다는 의사를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강대국들에게 전하는 것이 목표였던 만큼 당초 계획을 변경하여 탑골공원에 가지 않고 인근 음식점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삼창한 뒤 경찰에 전화를 하여 자진 체포되었다.

한편 탑골공원에 운집한 학생들을 위시한 군중들은 민족대표들이 오기만을 기다렸으나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자 경신학교 학생 정재용(鄭在鎔)이 팔각정으로 올라가 학생들이 민족 대표에게서 받아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거리로 나가 만세시위를 펼쳤다. 여기에는 만세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혹은 고종황제 국장을 보기 위해 경향 각지에서 모인 민중들이 가세하여 수십만의 군중들의 열기가 고조되었으며 많은 학생들과 주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너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초기에는 비폭력, 평화시위를 했으나 일제는 폭력으로 진압하였고 그럼에도 시위 열기는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만주, 중국, 미주, 하와이 등 세계각지로 퍼져 나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국내시위도 서울에서 각 도시로, 도시에서 군, 면 등 농촌으로 빠르게 확산되어 전국을 뜨겁게 달구는 조선반도가 되었으며 시민과 학생들뿐만 아니라 농민과 노동자, 심지어는 기생 등 하층민까지 참여하는 범국민적인 독립운동이 되었다. 전국적으로 벌어진 만세시위는 일제의 포악한 무력진압에도 불구하고 200만 민족이 들고 일어난 거국적인 민중운동으로 발전하여 대한의 국맥이 살아있음을 세계에 선포한 일대 혁명운동이었다.

의외의 저항에 당황한 일제는 헌병, 경찰, 군대 등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만세시위를 진압하였고 시위자들을 검거하였으며 무자비하게 학살을 자행하였다. 3.1운동으로 당시 투옥된 사람들의 직업별 분포를 보면 농민이 56%10,846, 학생. 지식인이 20%3,742, 상공업종사자 11%2,242, 노동자 10%2,126, 기타 3%555명 도합 19,511명으로 기록되고 있다.

3.1운동은 우리민족의 열화같은 독립의지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독립운동을 이끌어갈 보다 조직적이고 통일된 지도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이후 중국 상하이를 중심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각고의 노력 끝에 여러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연합으로 세워졌다.

일제는 일련의 상황을 겪으면서 무력만으로는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꺽을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포기한 그들은 문화통치로 통치방식을 바꾸기에 이르렀다.

3.1운동 이후에도 만주와 연해주에서의 무장독립군 활동은 활발하게 계속되었으며 노동자와 농민들은 3.1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민족의 독립운동에서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시민 자각운동으로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1920년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의 시작과 활성화의 새바람이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의 3.1운동은 아시아 각국의 민족운동에도 크게 영향을 끼쳐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비폭력운동, 베트남과 필리핀의 독립운동 등 아시아 여러 나라의 민족 자각 반제국주의운동에 크게 자극을 주었다.

3.1운동을 계기로 민족을 대표하는 임시정부가 여러 지역에 수립되었다. 19193월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 대한국민의회가 만들어지고, 동년 4월에는 한성정부가 국내에 수립되었다. 그리고 중국 상하이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 후 독립운동에 총력을 다 하기 위해 통합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였고 그 결과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상하이의 임시정부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를 통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를 통합하여 수립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진통이 있었으니 독립운동의 방향에 대한 이견 때문이었다. 안창호(安昌浩)의 실력양성론, 이승만(李承晩)의 외교론, 이동휘(李東輝)의 무장 투쟁론이 그것이다. 결국 많은 논의 끝에 외교론을 주장하는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이동휘가 국무총리를 맡으면서 통합 임시정부는 19199월 상하이에서 출범을 하였다.

임시정부는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로서 삼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입법기관인 임시의정원과 행정기관인 국무원, 사법기관인 법원으로 구성되었으며 일제의 강점으로 실제적 권한을 행사할 수 없는 임시정부였지만 봉건군주제인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에서 민주공화제인 국민의 나라 대한민국의 첫 거름을 내딛는 혁명적인 정부의 수립에 큰 의미가 있게 된 것이다. 임시정부는 수립 후 본격적으로 우리나라 독립에 대한 소식과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위해 비밀행정 조직인 연통제를 만들었고 상호연락을 비밀리에 주고받기 위하여 통신기관으로 교통국을 설치하였다. 특히 만주 이륭양행에 근거를 둔 단동 교통국의 활약과 많은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중국과 미국 등 국외에 거주하는 동포에게 독립공채를 발행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였다.

김태수 전 안성3.1운동기념관장, 안성4.1독립항쟁기념사업회장

 

자치안성신문 (news660@naver.com)

댓글0

스팸방지코드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