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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1-09-24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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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면민의 항쟁 – “전주는 넘어뜨리고, 일본인 건물은 불태우다”

[연재] 김태수 전 안성3.1운동기념관장 편찬 ‘신문조서에 의한 안성4.1독립항쟁, 2일간 해방사’ - 26

기사입력 2021-09-10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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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일제강점기 민족의 독립을 위해 전국에서 일어났던 3.1만세운동에서 안성군 원곡면·양성면은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과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과 함께 만세운동의 목적인 독립을 위해 무력을 동반해 치열하게 저항했던 3대 실력 항쟁지 중 한 곳이다.

그리고 그 항쟁을 통해 일제강점기 전국에서 유일하게 191941일과 2일 일제를 완전히 몰아내고 해방을 쟁취해낸 곳이 안성 원곡·양성면 3.1만세 운동이었고, 그 원곡·양성 만세 운동을 포함해 안성 곳곳에서 들불처럼 일어나 일제에 저항했던 것이 안성3.1운동이다.

이에 당신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의 자손이기도 한 김태수 전 안성3.1운동기념관장이 신문조서(訊問詔書)’ 기록을 중심으로 <안성4.1독립항쟁, 2일간 해방사>를 발간하고 게재를 위해 본지에 보내와 이를 연재한다.


<우편소(금고)>

조경수(趙敬洙,), 남현서(南玄西)와 최은식(崔殷植), 김경완(金敬完), 김봉현(金鳳鉉), 이유석(李裕奭), 정용재(鄭容在), 홍창섭(洪昌燮), 김순서(金順西), 김중식(金重植), 이덕순(李德順), 김희식(金熙植), 심홍택(沈弘澤) 등 여러 사람이 합심하여 우편소 금고를 운동장으로 끌어내었고, 김경완(金敬完)이 금고를 파괴하고자 도끼를 갖어 오라 하니 칠곡리 이경백(李敬伯, 李華榮)이 가지고 왔고, 여럿이 금고를 부수니 돈 20원이상이 나왔으며 그중 2원을 허자삼(許玆三)이 주워 사용했다고 허자삼이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금고를 남현서(南玄西)가 불속에 집어넣어 태웠다.

<우편소(전신주)>

일행 중 이유만(李裕萬)은 가운데 서 있는 전주를 조경수(趙敬秀), 이근수(李根洙) 7~8명과 함께 그것을 밀어서 넘어뜨렸다고 했고, 최병일(崔秉一)이 증언하기를 이희룡(李熙龍)이 최탁봉(崔澤鳳)과 함께 전주를 넘어뜨리고 있었다고 했으며, 일부는 곧 옆의 전주를 넘어뜨리고자 하여 이진영(李鎭榮), 이흥길(李興吉), 이유만(李裕萬), 조경수(趙敬洙), 이근수(李根洙), 이유항(李裕恒), 남현서(南玄西), 이경백(李敬伯) 장덕관(張德寬) 등과 함께 전주를 잘라 넘어뜨리려 했으나 잘 넘어지지 않자 이흥길(李興吉), 조경수(趙敬秀), 최은식(崔殷植), 이희룡(李熙龍), 김순옥(金順玉), 최택봉(崔澤奉), 이금철(李今哲), 이유항(李裕恒), 최재옥(崔在玉) 등은 군중속에 떨어져 있는 도끼를 주어 전주를 찍어 일행과 함께 넘어뜨렸고 그 것을 패어 불을 붙였다고 진술하고 있다. 양성주재소 순사(고야병장(高野兵藏)의 증인신문에 의하면 이 때 사용된 도끼는 고야순사의 사제품으로 주재소에 놓아두었던 것을 시위대가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칠곡리 이홍기(李洪基)의 진술에는 전신주 하나는 잘라 넘어뜨렸으나 두 번째가 좀처럼 넘어지지 않았으므로 밑둥에 불을 붙여 태워 버렸다고 한다. 외가천리 이희룡(李熙龍)에 의하면 같은 동리 이근수(李根洙)와 함께 전주 밑둥에 짚을 쌓아 불을 붙였고 이희룡은 불이 잘 타도록 짚을 가져다가 던져 넣었다고 했다.

칠곡리 이태영(李泰榮)의 진술에서도 김배관(金培寬)과 김광오(金光五), 이규완(李圭完), 그리고 기타 3-4명이 전주를 밀어 넘어뜨리려 했으나 좀처럼 넘어가지 않으므로 거기에 타고 있는 나무불을 가지고 와서 태운 다음 하나를 넘어뜨렸다고 하며, 이규완(李圭完)의 진술에 의하면 조경수(趙敬洙)가 도끼를 가져와서 전주를 잘라 넘어뜨렸으므로 우리들도 다수와 더불어 그것을 도와 넘어뜨리고, 또는 전선을 절단하고 전주를 불태웠다고 했다. 전주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 우편소 안으로 들어가 책상을 들고 나와서 불속에 넣었다고 했다, 증인 지문리 이산봉(李山鳳)의 증언에 의하면 이금철(李今哲)이 우편소 두 번째 전주, 곧 주재소 쪽을 향해 가면 왼쪽 밭 가운데 서있는 전주를 받치고 있는 철사를 끌어 당기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칠곡리 이광국(李光國, 李成烈)의 조서에 의하면 우편소를 부숴버리고 나서 일동은 여러조로 나눠 양성면사무소, 또는 일본인의 집으로 몰려갔다고 했다.

<잡화상 外里與秀의 집>

이어서 남현서(南玄西), 최은식(崔殷植), 이광국(李光國,李成烈), 조경수(趙敬洙), 김봉현(金鳳鉉, 一名 舜求), 이규철(李圭喆), 이경전(李敬全) 정호근(鄭鎬根) 이양섭(李陽燮) 등의 일부 시위대는 일본인 잡화상(外里與秀)의 집으로 몰려가 군중을 선동하며, 독립만세를 부르고, 일부는 투석하고 점포의 문을 부수고 집안으로 들어가 물품, 가구 등을 끄집어내어 밖으로 던지고, 일부는 석유를 부어 바깥에서 불태웠다.

그리고 송우필(宋禹弼)에 의하면 일동은 잡화상점으로 몰려가서 최흥섭(崔興攝), 남상인(南相仁), 최은식(崔殷植), 남현서(南玄西), 이덕순(李德順), 등이 실내로 들어가 상품 등을 가지고 나와 그 들이 들고 있는 횃불로 점화하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하고 있으며, 정성유(鄭聖有), 전기선(全起先), 정용재(鄭容在), 김기성(金基聲), 소선옥(蘇先玉) 등은 타인이 들고나온 서류, 기구 등에 성냥불을 그어 불을 붙였다고 했다, 특히 이규완(李圭完)은 여러 사람과 함께 가게의 바깥문을 부수고 가게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고 했으며, 장원심(張元心)은 한번 투석했고 김순서(金順西), 이경전(李敬全)2-3번 투석하였으며 김순서(金順西)는 잡화상점 앞쪽 문을 발로 차서 부수었고, 이규동(李圭東)은 조경수(趙敬秀)가 책을 싼 것 같은 것을 주어 불에 던졌고, 이경전(李敬全)은 온돌에 쌓아 놓은 신문지를 들고나와 불태웠고, 과자를 주운 것으로 진술하고 있으며, 이규철(李圭哲)은 상점에서 짚신을 상점 앞마당으로 들고 나왔고 담배 2-3개를 주워 피웠다고 했다. 주종기(朱宗基)는 의류 및 물품을 들고나와 이미 불붙고 있는 곳에 던졌다. 이광국(李光國)은 상점 안으로 들어가 닥치는 대로 물품을 부수고 그것을 집밖으로 던졌다. 이성률(李聖律)은 실내로 들어가 벽시계를 끌어 내려 부쉈고 박용업(朴龍業)은 가구 중 판자 2장을 불속에 던졌다. 강봉세(姜鳳世), 강봉돌(姜奉乭)은 실내에 들어가 담배 등 기타상품을 바깥으로 끄집어내었고 남현서(南玄西) 등이 불 질러 태웠고 최재식(崔在植,)과 김정원(金正元), 김영희(金永熙,金熙敬), 정문오(鄭文五), 남장우(南璋祐)는 투석하였으며 이규창(李奎昌)은 가구, 상품 등을 밖으로 끄집어 내었다.

이때 내가천리 정문오(鄭文五)와 최은식(崔殷植)이 횃불로 집지붕에 불을 붙였으나 이웃 동포의 집에 옮겨붙을 염려가 있으므로 이홍기(李洪基)는 다른 사람과 그 불을 껐다고 진술하고 있다, 특히 일부는 담배, 과자 따위를 끄집어내었고 이규철(李圭喆)은 담배 꽃표 23개들이를 가지고 나왔으며, 또 사탕이 든 상자나 짚신 등을 내어 던졌고, 특히 정용재(鄭容在)가 사탕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소휘태(蘇輝泰)는 그 것을 먹으면서 가구를 날랐고, 김중식(金重植)은 실내에 들어가 권연, 기물 등을 상점앞 마당에 들고 나왔고, 날라다 논 가구에는 이유석(李裕奭), 홍창섭(洪昌燮), 김계성(金桂成)이 불을 놓아 태웠다. 이한영(李漢榮)은 그 집 문을 돌로 부수었고, 이유만(李裕萬)은 일본인 집앞에서 군중이 던져내는 물품을 일일이 모아 그 것에 불을 붙였다. 안철재(安喆載)는 사탕이 든 병을 끄집어 내어 앞뜰에 던져 부수었다. 이발영(李發榮)과 남장우(南璋祐)는 군중과 함께 돌을 던졌고, 이규완(李圭完)은 집에 들어가서 온돌 입구의 문을 돌로 부수었더니 군중이 난입하여 상품을 끄집어내어 불태웠다고 했다. 이경관(李敬寬)은 방안으로 들어가 성냥통을 가지고 나왔다고 했으며, 염만흥(廉萬興)은 만세를 불렀다.

특히 여기 일본인의 집에서 집 건물과 물품에 불을 지르는 과정에서 시위대가 취한 주목해야 할 중요한 조치가 있었으니 바로 우편소와 일본인의 집 건물에 방화를 자제한 사항이다. 우편소에서는 일부 군중이 건물에 불을 붙인 것을 이홍기(李洪基) 등이 민가에 옮겨 붙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불을 껐고, 일본인의 집에 도착했을 떼 주모자 남현서(南玄西)가 이르기를 일본인의 집에 불을 지르면 동포 조선인의 집에도 불이 붙을 염려가 있으니 절대 방화하지 말라는 외침에 우편소와 일본인의 집에는 방화하지 않았다는 이진영(李鎭榮)의 증언이다.

특히 대정862京城지방법원 판사 삼전촌부미(三田村富彌)의 검증조서에 보면 외리여수(外里與秀)의 집은 읍내 주막리 중앙통로 남쪽에 있고 이웃집 처마와 인접해 있으며 모두 목조 초가 조선식 평가라고 하였는바 목조 초가이니 한번 불이 붙으면 순식간에 불이 전체로 붙을 것이며 또한 이웃집 처마와 인접해 있다고 하였으므로 불길이 인근으로 점화되어 걷잡을 수 없는 떼불로 번지어 커다란 피해를 유발케 했을 것을 예상한 시위대는 성숙한 자제력으로 사전 큰 화재를 막은 것이다.

이는 비록 주동자 남현서(南玄西)와 이홍기(李洪基) 등의 주장이었지만 참가자 모두에게 일관되게 형성된 공감대였기에 누구도 이의하지 않고 건물에 방화하지 않았으며, 또 불을 자진하여 껐고, 건물 안의 집기와 물품만 끄집어내어 불태웠 던 것이다. 나라 잃은 설움과 폭압에 대한 저항으로 떼 지어 몰려다니면서 목이 터져라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었고, 돌 던져 유리창과 판자벽을 깨트렸으며, 물품 끄집어내어 부수고 그리고 불태우고, 또 건물을 불 질러 태워버리긴 했어도, 한줄기 근저에 면면히 흐르는 동포애와 책임감, 즉 애족정신과 자제력은 그 소란한 와중에도 엄연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

우편소나 일본인의 가옥이 읍내 주택가에 접해 있으므로 우편소나 일본인의 건물에 점화되었을 경우 주택가에 불이 옮겨 붙어 걷잡을 수 없는 동포들의 피해를 예견한 시위대의 판단은 건물이면 무조건 태우고 무조건 부수는 저들이 말하는 소란이나, 소요, 또는 난동꾼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선별하여 부수고, 방화하는 극대화된 저항정신 표출과 목적하는 해방만을 달성하고자 하는 위대한 조선독립 일꾼임을 힘주어 표출했던 것이다.

김태수 전 안성3.1운동기념관장

 

자치안성신문 (news6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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