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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운동 당시 생활상 - 날품팔이로 생계를 이어가는 시위참가자의 팍팍했던 삶

[연재] 김태수 전 안성3.1운동기념관장 편찬 ‘신문조서에 의한 안성4.1독립항쟁, 2일간 해방사’ - 31

기사입력 2021-10-23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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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일제강점기 민족의 독립을 위해 전국에서 일어났던 3.1만세운동에서 안성군 원곡면·양성면은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과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과 함께 만세운동의 목적인 독립을 위해 무력을 동반해 치열하게 저항했던 3대 실력 항쟁지 중 한 곳이다.

그리고 그 항쟁을 통해 일제강점기 전국에서 유일하게 191941일과 2일 일제를 완전히 몰아내고 해방을 쟁취해낸 곳이 안성 원곡·양성면 3.1만세 운동이었고, 그 원곡·양성 만세 운동을 포함해 안성 곳곳에서 들불처럼 일어나 일제에 저항했던 것이

안성3.1운동이다.

이에 당신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의 자손이기도 한 김태수 전 안성3.1운동기념관장이 신문조서(訊問詔書)’ 기록을 중심으로 <안성4.1독립항쟁, 2일간 해방사>를 발간하고 게재를 위해 본지에 보내와 이를 연재한다.


참고인 신문에서 元谷外加川리 남장우(南璋祐)의 처 한()씨의 진술에 의하면 남편 남장우는 금년 음력 2월경에 집에서 무엇을 하며 지내는가에 동생 집을 짓느라고 집에서 새끼를 꼬는 일이 종종 있었고 그일 외에는 낮에는 나가서 품팔이를 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형제간 상부상조하는 모습과 보편화되어 있는 새끼 꼬기를 볼 수 있으며, 날품팔이로 생계를 이어가는 시위참가자의 팍팍한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며 특히 집을 짓는데 쓰기 위하여 새끼를 꼰다고 하였는데 오늘날의 현대화된 건축에서는 새끼가 어디에 필요한가 하겠지만 당시 건축방식은 사방에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운 다음 지붕갓을 얹고 벽에 세로막대기를 대고 거기다가 수수깡을 새끼로 엮은 다음 흙을 발라 벽으로 삼는 식이었기에 새끼가 꼭 필요했던 것이고 가지고 있는 땅마지기가 얼마 안 되니 천상 품팔이라도 하여 생계를 꾸려 나가는 세태였던 것이다.

지문리(芝文里) 원성삼(元性三)의 당질인 증인 원영본(元永本, 25)의 진술에서도 금년 음력 31일 밤 증인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였는가에 마을의 안춘재(安春載)의 집 객실에서 짚신을 한 켤레 삼고서 귀가하여 잤다고 하고,

지문리 증인 최인현(崔仁賢, 73, 崔天甫의 부친)의 증인신문에서도 증인은 음력 31일 밤 어디에서 무엇을 하였는가라는 신문에 자택에서 짚신을 삼고 있었다고 했고, 아들 최천보(崔天甫)는 그날 밤(41) 무엇을 했는가에 역시 지붕에 사용할 새끼를 꼬고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역시 당시 시골 겨울밤의 중요한 일은 모든 사람이 새끼 꼬기나 짚신 삼는 것이었음을 잘 나타내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당시 세습(世習)의 한 단면으로 병난 아이의 병 고치는 풍습을 엿볼 수 있는 장면으로 굿 모습을 볼 수 있으니,

칠곡리 이인영(李仁榮)의 형수며 이경열(李敬烈)의 처 증인 백()씨의 진술에 금년 음력 31일 밤 그대의 마을 사람들은 원곡면사무소로 몰려가서 만세를 부르고, 그로부터 양성으로 몰려갔다는데 그대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였는가 하는 질문에 이인영(李仁榮)의 아이가 죽는다고 하여서 저녁때부터 동인 집에 가서 다음 날 아침 귀가하였다. 병으로 앓고 있는 사람은 누구였는가 하니 막내가 앓고 있었다고 하였으며, 그대는 이인영(李仁榮)의 집에 가서 무엇을 하였는가 하니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앓고 있는 아이의 옆에 앉아 있었다.

이인영(李仁榮)의 처는 무당굿을 한다면서 밥을 짓고 있었다고 했고, 어린아이는 언제부터 병에 걸려 있었는 가고 물으니 언제부터 병에 걸렸는지 그런 것은 알지 못하나 이인영(李仁榮)은 타인의 집을 빌려서 살고 있었으나 아이가 병에 걸려서 급히 집을 지어서 금년 2월 그믐날에 그 집으로 이사하였다고 했다.

이인영(李仁榮)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하니 아이가 죽어가고 있으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이 옆에 앉아 있었다고 했으며 이인영의 처가 무당굿을 하기 위하여 밥을 짓고 있었다고 진술하였는데 어떠한 굿을 하였는가 했고 굿을 한 것은 아니고 음력 2월 그믐날 밤에는 밥을 지어서 신에게 제사하였고, 신축 가옥에 이사하여서 아이도 병에 결렸고 하여 떡을 만들어서 집의 신에게 바쳤다고 하여 당시 일반화된 미신이 폭넓게 퍼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계속되는 신문에 쌀을 갈아 끓여서 온돌 위에 뿌린 것이 아닌가 하였더니 그렇다, 음력 2월 그믐날 밤 쌀을 간 것을 끓여서 이인영이 방을 얻어 있던 온돌에 뿌렸다고 했다.

어찌하여 그런 일을 하였는가 하고 하니 이인영의 아이가 병을 앓고 있어서 내가 내 마음대로 한 것이다. 고 하였으며 그 후 병든 아이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니 음력 34일경부터 쾌차하기 시작했는데 아직은 완쾌하지는 않았다고 하여 당시 가난한 시절 병원이나 약보다는 손쉽고 싸게 먹히는 민간 미신요법이 성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광경이다.

또한 이대근(李大根)의 고등법원 예심계 판사심문에서 군중 중에는 면장외 면의 직원 등도 가세하였는가라는 신문에, 모른다, 면 직원이면 머리를 깎았을 것인데 우리들 부근에는 그와 같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는 진술로 보아 당시 일반인은 상투를 틀고 있었으나 면 직원은 삭발하여 구분이 되었던 것으로 당시의 세태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김태수 전 안성3.1운동기념관장, 안성4.1독립항쟁기념사업회장

 

자치안성신문 (news6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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