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 홍계남 장군 고루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1호).
의병장 이덕남 장군 묘(경기도 기념물 제26호).
의병(義兵)은 사전적 의미로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하여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군대. 또는 그 군대의 병사.”를 일컫는 말이다.
국가공동체에 침입한 외적을 국가가 공식 군대를 통해 해결하지 못해 위기에 처했을 때 민중들이 스스로 떨치고 일어나 국가공동체와 지역공동체 그리고 구성원인 국민(백성)의 안녕을 지키기 위해 만든 민중의 군대 또는 그 군대에 소속된 병사를 말한다.
국가가 정규군인 관군(官軍)을 통해 공식적으로 주권자인 국민(백성)의 안녕을 지켜주지 못하는 무능함이 발생했을 때 민중이 외적의 약탈과 생존 위협에 저항해 국가공동체와 지역사회 붕괴를 지켜낸다는 의(義)를 위해 자발적으로 만든 백성(국민)이자 주권자의 군대 또는 병사가 의병(義兵)이었다.
한국사에서 이러한 관군에 대비되는 의병은 조선 시대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말(韓末)의 1, 2차 의병으로 크게 구분되고, 이후 동학으로 이어진 의병의 맥(脈)은 국가공동체인 대한민국이 일제강점기 3.1운동을 거쳐 건립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따라서 의병은 한반도 국가공동체가 봉건사회였던 조선이 주권자인 국민에 의해 주권자의 나라인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만드는 근대화 과정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안성에는 의병장 홍자수, 홍계남, 이덕남 장군이 있었다.
각설(却說)하고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국가였던 조선(朝鮮)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한양을 향해 급격히 북상했지만, 당시 국가였던 조선의 군대인 관군은 밀고 올라오는 왜군에게 무력하게 궤멸했고, 결국 선조 임금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부랴부랴 수도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을 가야 했다.
이때 국가인 조선이 지켜주지 못했던 주권자인 국민(백성)의 생존과 왜구의 수탈에 맞서 민중 스스로 의병으로 조직해 떨치고 일어났다.
경상도 곽재우, 전라도 고경명, 충청도 조헌, 경기도의 홍계남·이덕남 등 의병장이 민중들과 함께 지역공동체와 구성원의 생존 위협과 수탈 위기에 맞선 것이 그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국가인 조선(朝鮮)과 지역인 안성을 외적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떨치고 일어났던 주권자이자 민중인 의병이 의병장을 구심점으로 뭉쳐 국가와 안성지역 공동체를 지켜냈다.
그때 의병장이 홍자수, 홍계남, 이덕남 의병장(義兵將)이었다.
남양 홍 씨인 홍자수 의병장을 중심으로 보면 홍계남 의병장은 서자(庶子)고, 이덕남 장군은 누이의 아들인 조카인 생질(甥姪)이다.
사촌지간이 홍계남 장군(외사촌)과 이덕남 장군(고종사촌)은 아버지이자 외삼촌인 홍자수 장군 슬하에서 함께 자랐다.
안성시지 등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의병장 홍계남 장군(1564~1597)은 안성(서운면 청룡리)에서 진천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엽돈령에서 진을 치고 있는 아버지 홍자수 장군과 왜구를 협공해 크게 무찔렀다.
안성시지에는 “그(홍계남)가 비로소 대장기를 세움에 며칠 사이에 그를 따르는 자가 3,000여 명이나 되었고 마침내 목촌(木村. 미양면 구수리)에 보루를 쌓고 주둔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홍계남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적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홍장군’이라 불리기도 했다.
홍계남 장군은 안성뿐만 아니라 전라, 경상지역까지 진출하였고 권율 장군이 경성 회복작전을 펼 때 영주군수 고언백은 “홍계남이 없으면 경성의 인심을 의지할 데가 없고 제군의 선봉이 될 만한 자가 없다”고 할 만큼 용맹성을 인정받았고, 선조 임금으로부터 이순신이나 권율, 곽재우 등과 함께 은사를 받았으며 김덕령과 함께 말을 하사받기도 했다.
이덕남 장군(?~1592년)은 서운면 양촌리에서 태어났지만 조실부모하고 외삼촌 홍자수 장군 슬하에서 자랐다.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외삼촌 홍자수 장군과 외사촌 홍계남 장군, 그리고 안성의 민중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다.
농기계를 녹여 무기를 만들고 북진하는 왜적을 여러 번 격퇴했다.
용인, 죽산, 양지에 진을 구축하고 안성과 진천의 경계인 서운산에 토성인 서운산성을 쌓았다.
경기와 호서 지방 의병과 합세해 여러 싸움에서 승리했다.
죽산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위기에 처한 홍계남 장군을 구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홍계남 장군이 자리를 비운 사이 왜군의 갑작스러운 습격을 받아 외삼촌 홍자수 장군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정승훈 회장, 경기도에 민원 후 일부 긍정 답변
자발적으로 나서 진양사 활성화 어떻게 귀결될까?
정승훈 ‘진양사 추모사업회’ 회장이 임진왜란 의병장 홍계남, 이덕남 장군과 안성 의병의 역사가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그런 의병장 이덕남 장군과 홍계남 장군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남양 홍씨 문중과 영천 이씨 문중 그리고 서운면민을 중심으로 임진왜란에서 국가와 안성 공동체 지키고 민중의 생존 위협과 수탈을 막아주었던 마음을 새기며 두 분의 위패를 모신 사당 진양사(陣陽祠)에서 춘향제를 올리고 있다.
이덕남 장군과 홍계남 장군을 기리는 춘향제는 그전에도 묘역에서 이어져 왔으나 특히 지난 1986년 두 분을 기리는 진양사가 지어진 이후에는 매년 음력 삼월 초정일(初丁日)에 봉행하고 있다.
사당(祠堂) 또는 사우(祠宇)인 진양사가 위치한 곳의 행정구역은 미양면 구수리 85 야산으로 미양면과 서운면의 경계이고 서운면 양촌리, 신기리 등과 붙어 있는 곳으로 당시 의병들이 왜군을 무찌르기 위해 진을 친 곳이라 ‘진재’로 불렸던 곳이다.
춘향제는 본래 두 분 의병장의 공덕을 기리고자 하는 안성주민들의 열망을 모아 유림에서 주관하다가 2018년 3월 ‘진양사 보존 추모회’ 만들어 이덕남 장군의 문중인 영천 이씨와 홍계남 장군의 남양 홍씨 문중에서 번갈아 제향을 지내오고 있다.
그러나 매년 제향을 지내고는 있지만,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최근 ‘진양사 추모사업회’ 정승훈 회장이 경기도에 <홍계남, 이덕남 장군 추모 기념사업 활성화 방안>을 제출해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고 전해왔다.
경기도 답변 공문에 따르면 정승훈 회장의 제안은 단기적으로 춘향제 때 교향악단 공연을 위한 보조금 지원과 관리실 지원이다.
제안에 대해 경기도는 “진양사 춘계 추모 교향악 공연 및 교육사업지원은 매년 시행하는 도내 문화유산 대상 ‘문화유산 활용 사업’ 및 ‘지역문화교육사업 공모사업’ 공모 시 신청해 선정되면 지원이 가능”하다며 공모에 신청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관리시설 건립은 “해당 문화유산을 관리하는 안성시에서 사업 지원 타당성, 필요성 등에 대한 사전 검토가 필요한 사업”이라는 답변이었다.
‘진양사 춘계 추모 교향악 공연 및 교육사업지원 사업’은 공모 신청을 통해 가능하지만, 관리시설 건립은 안성시를 통한 사전 검토 사안이라는 것이다.
올해 78세(1948년)로 팔순에 가까운 정승훈 회장은 서운면 현매리에서 태어나 18세에 서운면 신기리 진양사 인근으로 이사와 의병장인 이덕남 장군 묘와 홍계남 장군 고루비 그리고 두 분 의병장의 사당인 진양사 근처에서 60여 년을 살아 오다가다가 최근 ‘진양사 보존 추모회’ 회장이 되며 활성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안성에서 나고 자라 농사짓다 낙농을 했었고, 특히 젊어서 안성 첫 우유 회사인 ‘안성우유’를 운영하기도 했던 정승훈 회장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홍계남, 이덕남 장군과 의병들의 이야기가 묻히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진양사 춘향제 때 교향악단의 연주가 함께하는 음악회가 열려 인근 주민은 물론 안성의 여러 초중고 학생도 참여하는 행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관리실을 만들어 문화유산 해설사 등이 머물며 진양사, 이덕남 장군 묘, 홍계남 장군 고루비 등을 찾는 학생 등을 맞이하고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의병(義兵)의 사전적 의미는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하여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군대. 또는 그 군대의 병사.”를 말한다.
안성에서 나고 자라 78세인 정승훈 회장 지역의 어른이자 선배로, 자발적으로 나서서 지금의 국가와 안성 공동체를 있게 한 안성 의병의 역사를 지역 주민과 후배 학생들에게 전해 주고 싶다는 선의(善意)가 어떤 과정으로 귀결(歸結)될지 관심이다.
이후 임진왜란 의병장 홍자수, 홍계남, 이덕남 장군과 의병에 대해 살펴볼 예정이다.
최용진 기자 news66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