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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6-07-26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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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홍자수 서자(庶子)였던 의병장 홍계남 장군

안성 의병장 이덕남, 홍계남 장군을 기억하자 ②
서자(庶子)였지만 임진왜란 전 통신사 무관으로 일본 갔었다

기사입력 2025-06-15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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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홍계남 장군 고루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1호).

홍계남 장군 고루비 전경.

 


홍계남 장군 고루비 안내판.

본지 1259, 1260호에 이어 이번 호에서는 의병장 홍계남 장군을 <안성시지(201111)><안성 향토사료집(안성문화원. 20036), <홍계남 장군 고루비 안내판> 등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의병장 홍계남 임진왜란 때 명장으로 고종사촌인 이덕남 장군과 부친 홍자수 장군과 함께 안성은 물론 충청, 전라, 경상 지역까지 전공을 세운 불세출(不世出)의 영웅이었다.

먼저 안성에 전해 내려오는 기록 등을 통해 살펴보고 최근 임진왜란 불세출의 영웅 의병장 홍계남 장군에 대한 다양한 조명, 특히 너무나 유명한 조선 시대 허균(許筠, 1569~ 12101618)의 홍길동전의 홍길동 실제 모델이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살펴볼 예정이다.

앞서 얘기했지만, 홍계남(洪季男 1564. 명종 19~1597년 선조 30)은 임진왜란 의병장 홍자수 장군의 아들이자 의병장 이덕남 장군의 외사촌이다.

지금의 안성시 서운면 양촌리에서 남양 홍씨 홍자수 장군의 아들이지만, 정실(正室)부인의 아들인 적자(嫡子)가 아니라 소실(小室)부인의 아들인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 시대는 적서차별(嫡庶差別)이 엄격해 같은 양반의 자식이라도 정실부인 소생의 아들은 양반이었고, 소실부인의 아들은 중인으로 차별받았다.

쉽게 말해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의 형이라 부르지 못했다는 얘기처럼 적서(嫡庶)의 차별이 심각한 사회가 조선 시대였다.

그러나 그 조선 시대 양반이었던 홍자수 장군 천첩(賤妾)의 소생인 서자로 태어난 홍계남 장군이었지만, 신분의 벽을 허물고 양반 아버지 홍자수 장군, 적자 형제들 그리고 양반인 고종사촌 이덕남 장군과 함께 의병장으로 안성지역은 물론 충청, 전라, 경상도에서 왜적의 침입에 맞서 뛰어난 활약을 펼쳐 사후 판돈령 부사에 추증되기도 했다.

<안성시지> 등에 따르면 의병장 홍계남 장군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단정하고 위용이 뛰어나 무예에 특출한 재능이 있었다.

<안성시지>에는 용력이 뛰어나고 말달리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금군(禁軍. 임금을 지키던 군대)에 소속되었다고 나온다.

그래서일까 신분제 사회로 적서차별이 엄연했던 조선 시대 양반 자제의 등용문이었던 과거제도(科擧制度)를 통한 관료 진출을 못 했고, 출중한 무예 실력으로 금군의 소속이 되었다.

그러다 1590(선조 23) 일본에 파견되는 통신사의 군관으로 선발되어 정사 황윤길(서인 대표), 부사 김성길(동인 대표) 일행을 따라 일본에 갔다가 이듬해 1591년에 돌아왔다.

당시 왜인들이 홍계남 장군이 말 타고, 활 쏘는 것으로 구경하였다고 기억했다.<안성시지>

<안성 향토사료집>에는 일본인에게 무예를 보여주어 그들을 탄복시켰다고 나온다.

여기서 통신사는 조선이 일본 에도 막부에 파견한 대규모 사절단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특히, 1590~1591년 통신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을 탐지할 목적으로 위해 파견된 중요한 특사였다.

그러나 1591221(음력 128) 일본에서 귀환한 통신사 일행은 3월 조정에 서로 다른 상반된 보고를 내놓는다.

서인이었던 정사 황윤길과 동인이었던 서장관 허성은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올 것이다라고 주장을 하였고, 동인이었던 부사 김성일은 침략의 징조를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민심을 동요시킨다는 의견을 내놓았고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김성일의 의견을 선택했다.

그러나 결국 통신사 귀국 이듬해인 1592년 임진년 왜구의 침임을 받게 된다는 유명한 조선 통신사 사건의 통신사절단에 홍계남 장군이 군관으로 다녀왔다는 것이다.

1591년 통신사 사건은 정파적 이익을 국가공동체 이익보다 우선했던 조선의 정치 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 지금도 정국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 크다.

이후 그의 재주와 실력이 뛰어난 그는 관직으로 경기도 조방장, 충청·경상도 조방장, 수원판관, 영천군수 등을 역임했고, 통정대부(通政大夫. 문관. 조선 시대 정삼품 당상관)에 이르렀고, 사후 선조 임금이 종일품인 판돈령부사로 추증(追贈)했다.

부친 홍자수 장군과 이덕남 장군의 출생연도는 남아있지 않지만, 홍계남 장군은 1564년에 태어나 1597년에 적군인 왜군을 토벌하다 전사했다는 생몰연대가 남아있다.

34(33)40세 불혹(不惑)에도 못 가고, 30세 이립(而立)을 막 지난 젊은 나이에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것이다.

서자임에도 뛰어난 실력이 있어 군관으로 통신사에 합류할 수 있었고, 이후 정규군과 의병군으로 활약하다가 다시 관군으로 활약했던 때의 여러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기도 한다.


정규군에서 의병인 된 그는 엽돈령에서
왜적 7명의 수급 베어 막대기에 매달아


홍계남 장군 고루비 문화재 표지석.

<안성시지>에 따르면 1592년 순변사(巡邊使) 이일 장군 휘하에 예속되었다가 이일이 상주에서 패하자, 신립 장군에게 가서 종사하였으나 신립의 오판으로 충주 탄금대에서 패하고 자결하자 밤낮으로 행군해 서울에 이르렀지만, 선조의 어가는 이미 몽진(蒙塵)을 떠난 후였다.

그래서 안성으로 돌아와 아버지 홍자수 장군과 이덕남 장군과 함께 안성과 진천 경계 엽돈령에서 왜적을 물리치고 대장기를 세우자, 며칠 사이에 3,000여 명이나 되는 의병이 모였고, 마침내 목촌(미양면 구수리)에 보루를 쌓아 주둔하며 왜적과 싸웠다.

이때 기록상 의병으로 처음 엽돈령에서 왜적을 물린 친 것과 관련해 <안성향토사료집> 이덕남 편에서는 왜구 10명 사살, <편역 안성기략>7명 사살, 홍계남 장군 고루비 안내판에는 “7명의 목을 베어 막대기에 매달아 적을 퇴각시켰다고 나온다.

그리고 <편역 안성기략> 95페이지에 의병 30여 명을 불러 모았다. 왜적이 바야흐로 진천 엽돈령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계남이 쫓아서 돌격하여 왜적 수급 일곱을 베어 장대 위에 걸어 놓았고 적은 물러났다. 그 이후 의병 대장기를 굳게 세우자, 수일 사이에 모여들어 군(안성군)의 남쪽 목촌(미양면 구수리)에 결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편역 안성기략>에서는 <신증여지승람 (93페이지)>의 인용을 통해 홍자수는 향중(지방)에서 일어나 그 아들 진, , , 뢰의 네 사람과 얼자(孼子) 계남 등과 함께 나무를 베어 깃대로 삼고, 기물을 녹여 병기를 만들고, 인근에 격문을 붙여 의려(義旅. 의병 義兵)를 불러 모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리하면 임란 발생후 서운면 청룡리 인근 안성과 진천 경계 인근인 엽돈령(엽돈재)에서 홍자수 장군과 그의 홍계남 장군을 포함한 5명의 아들과 홍자수 장군 생질(甥姪)인 이덕남 장군과 30여 명의 의병이 처음 전투를 치렀고, 여기서 7명 혹은 10명의 왜적을 수급에 베어내며 승리하자 인근에서 3,000여 명의 의병이 몰려들었고, 이후 이들 의병과 함께 왜적과 싸웠다는 것이다.

그렇게 홍계남 장군이 홍자수 장군, 이덕만 장군과 함께 의병 초기에 지금의 서운면 신기리, 양촌리 그리고 미양면 구수리, 양변리 인근인 목촌(행정 구역상 미양면 구수리) 야산, 안성 시내에서 서운면 사무소와 청룡리 가는 길 고개인 진재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왜적과 싸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홍계남 장군과 홍자수, 이덕남 장군은 서운산(瑞雲山)에 산성을 쌓아 왜적과 대치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편역 안성기략>에 따르면 선조때 일어난 임진왜란 당시 서운면 덕곡리의 홍계남과 이덕남은 의병장이 되었다. 홍계남은 서운산 정상에 산성을 쌓아 좌성산이라 부르고, 이덕남은 덕곡리(양촌리) 앞산에 성을 쌓아 우성산이라 부르면 안성과 양성지역에서 의병을 불러모아 왜적과 대처하였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정규군이었던 홍계남 장군이 부친 홍자수 장군, 고종사촌인 이덕남 장군과 의병장이 된 곳은 그의 고향인 안성 서운면 양촌리 인근 목촌(미양면 구수리)과 서운면 청룡리 인근 엽돈령()와 서운산이었다는 것이다.

34세의 나이에 사망한 홍계남 장군과 관련해서는 그들이 진을 치던 고갯마루이자 고종사촌 형의 묘가 있는 진재 인근 미양면 구수리 산87-1번지에 <홍계남장군고루비 (洪季男將軍古壘碑)>가 남아 있다. (다음 호 계속)

자치안성신문 1261호에 나갔던 본 기사 제목 중 <의병장 홍사수 장군 서자(庶子)였던 의병장 홍계남 장군>의 홍사수를 홍자수로 바로 잡습니다.

전화 주신 독자님께 감사드립니다.

최용진 기자 news660@naver.com

 

자치안성신문 (news6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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