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최종편집일 2026-07-26 07:05

  • 기획취재 > 기획

영조 임금 서얼(庶孼) 철폐 논의에 안성 의병장 홍계남 장군이 등장한다

안성 의병장 이덕남, 홍계남 의병장(義兵將)을 기억하자 ⑥
임진왜란 후 132년, 사망 후 127년 지나도 홍계남 장군 활약이 남아 있던 셈

기사입력 2025-07-20 06:51

페이스북으로 공유 트위터로 공유 카카오 스토리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문자로 공유 밴드로 공유
영조실록-영조즉위년 12월 17일: 영조실록. 영조 임금이 신하들과 즉위년에 서얼(庶孼) 출신 차별 철폐 논의에 홍계남 장군이 등장한다. 서자 출신 걸출한 인재 나열에 홍계남 장군이 있었다.

​​​​​​​지난 호(1264)호에서도 서자(庶子) 출신 의병장(義兵將) 홍계남 장군이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 시대 신분제 사회에서 임금인 선조가 벼슬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살펴봤다.

선조실록을 중심으로 당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의 관군은 속수무책, 연전연패로 무너졌고, 임금인 선조는 수도인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을 가게 이르는 등 국가인 조선이 풍전등화, 백척간두에 놓였었다.

그때 전국에서 국가와 지역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의병이 일어났고 그들 의병이 왜군의 배후에서 관군도 하지 못했던 각종 전투에서 승리하며 조선은 전투에서 이기고 살아남을 희망이 생기게 됐다.

임금이 할 수 있는 것은, 관군이 아닌 의병 활약을 보고 받고, 사실상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지켜야 할 백성에게 의병을 일으켜 싸우라는 명령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명령보다는 스스로 일어나 지역과 국가 공동체 그리고 그 구성원인 백성들의 생존권을 지켜내는 의병장 등에게 벼슬을 내리는 것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서자(庶子)로 태어난 홍계남 등 민중에게 벼슬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홍계남 장군을 중심으로 살펴봤었다.

그러던 중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게 됐고, 그러다 영조가 즉위한 172412월 영조실록에서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서얼(庶孼) 차별에 대한 상소가 올라오기도 했고, 이후 임금과 신하가 논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예로 든 걸출한 사람 중 한 사람이 임진왜란 의병장 홍계남 장군이었다.

홍계남 장군이 1564년에 태어나 28세 때인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에서 활약했고, 159734세로 사망했으니, 영조 즉위년인 1724년은 임란 후 132, 그가 사망한 지는 127년이 지나도록 그를 기억하고 있던 것이다.

문제 제기는 서얼 진사(進士) 전진교 등 260명의 상소였다.

대략의 상소 내용은 <"서얼(&#23421;)을 고폐(錮廢)하는 법은 천하 만고에 있지 않던 바입니다. 삼대(三代)로부터 한(((대명(大明)에 이르기까지 서얼이 장상(將相)의 자리를 차지하여 명적(名績)을 드러내었으며, 우리 동방(東方)의 경우 위로 삼국(三國) 때부터 고려(高麗) 500여 년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취하는 법규(法規)가 한결같이 중화(中華)를 따라 차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태종조(太宗朝) 때 우대언(右代言) 서선(徐選)이 비로소 전에 없던 의논을 주창하여 서얼의 자손을 현직(顯職)에 서용(敍用)하지 못하게 했고, 그 뒤 강희맹(姜希孟)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찬차(纂次)할 때 입사(入仕부거(赴擧)하는 길까지 아울러 고색(錮塞)했던 것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대전(大典)을 반포한 해에 가뭄이 흑심해서 굶어죽는 사람이 잇따라 생기자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허물을 여기에 돌렸습니다. 그러므로 성묘(成廟)께서 측은하게 여기시고 경동(警動)하시어 장차 경장(更張)하고자 하시었으나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선묘(宣廟) 초에 신분(&#28614;) 1,000여 명이 글을 올려 원통함을 하소연하자, 선묘께서 하교하시기를, ‘해바라기가 해를 향함은 겉가지를 가리지 않으니, 인신(人臣)으로서 충성하기를 원하는 것이 어찌 꼭 정적(正嫡)이어야만 하랴?’ 하셨으니, 이에서 대성인(大聖人)의 지공지정(至公至正)한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리고 <그러다가 인묘조(仁廟朝)에 이르러 부제학(副提學) 최명길(崔鳴吉)이 동료인 심지원(沈之源김남중(金南重이성신(李省身이경용(李景容)과 더불어 글을 올려 힘써 통용(通用)할 것을 청하며 말하기를, ‘예제(禮制)의 제정이 삼대(三代)보다 엄함이 없으나, (()의 명목은 단지 사실(私室)에서만 행해졌고 공조(公朝)에서는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문지(門地)의 분별은 육조(六朝) 때보다 상세한 것이 없으나, 사람을 쓸 때는 오로지 그 아버지의 성()만 묻고 그 어머니의 성은 묻지 않았습니다. 대개 하늘이 인재를 낼 때 귀(()의 차이를 두지 않았고, 왕자(王者)가 사람을 쓸 때 문지(門地)에 구애되지 않았으니, 이것은 천리(天理)에 있어서 당연한 일이고 백왕(百王)이 바꾸지 않았던 바입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말하길 <우리나라의 서얼을 현직(顯職)에 서용하지 말자는 의논은 처음에서 서선(徐選)에게서 나왔는데, 그 뒤 가면 갈수록 한 마디 한 마디가 더욱 심각해져 마침내 자손까지 영원히 금고(禁錮)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재주와 덕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억눌리고 막혀 세상에 떨치지 못하고 배척받아 사람들 사이에 끼지 못한 채 마치 큰 죄나 지은 것처럼 고개를 숙이며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시는 부자(父子)의 은혜도 군신(君臣)의 의리도 없으니, 윤리(倫理)를 해치고 어기는 것으로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필부(匹夫)가 원망을 품어도 화기(和氣)를 손상시키기에 족한데, 하물며 그 수가 엄청나게 많은 경우에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성묘(成廟) 이후 서얼 중에서 걸출(傑出)한 사람이 많이 나왔는데, 박지화(朴枝華어숙권(魚叔權조신(曹伸이달(李達정화(鄭和임기(&#33425;)·양대박(梁大樸권응인(權應仁김근공(金謹恭송익필(宋翼弼)형제·이산겸(李山謙홍계남(洪季男유극량(劉克良권정길(權井吉)이 바로 그들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충(宸衷)에서 결단하시어 조용(調用)하는 길을 넓혀서 여신다면, 수백 년 이래로 허다하게 원통함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던 자들의 넋 또한 감격하고 고무되어 구천지하(九泉之下)에서 성덕(聖德)에 보답하려고 할 것이며, 천심(天心)이 저절로 형통하여 화기(和氣)가 흘러넘칠 것입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렇게 들은 영조 임금은 <“우리나라는 본래 편소(偏小)한데다 사람을 쓰는 것도 역시 몹시 넓지 않으므로, 내가 적이 개탄스럽게 여겨 왔다. 하늘과 사람은 하나이고 해와 달의 비침은 이미 정(()를 가리지 않으니, 왕자(王者)가 그 사람을 씀에 있어서 어찌 그 가운데 차이를 두랴? 그대들이 인용한 바는 근거가 있다. 그러나 다만 이 일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어 갑자기 변통할 수가 없으니, 신중하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 오로지 천천히 강구하여 처리함이 마땅하다. 삼조(三曹)의 낭청에 관한 일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인묘조(仁廟朝)의 수교(受敎)에 의해 가려서 의망(擬望)하게 하라하였다.

상소를 들은 영조가 서얼 문제에 대해 그 사람을 씀에 있어서 어찌 그 가운데 차이를 두랴? 그대들이 인용한 바는 근거가 있다고 공감했지만, “다만 이 일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어 갑자기 변통할 수가 없으니, 신중하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 오로지 천천히 강구하여 처리함이 마땅하다며 사실상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임금인 영조가 논의 중 공감했던 인용 근거에 나오는 서자(庶子) 출신 인재에 의병장 홍계남 장군이 포함되어 임금과 신하가 논의했다는 것은, 그만큼 임진왜란 당시 그의 활약이 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분제 양반사회였던 조선 시대 차별받던 서얼(庶孼)에 대해 상소를 올리고, 임금과 신하들이 마주 앉아 논의했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이렇게 살펴본 것은 <안성시지(201111)><안성 향토사료집(안성문화원. 20036)>, <홍계남 장군 고루비 안내판>, <편역 안성기략(2008)>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다가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개한 조선왕조실록에 원문과 해석본이 실린 것을 검색하며 얻은 홍계남 장군 관련 기록에 대한 욕심에서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의 시조인 태조로부터 철종까지 25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한 책으로 총 1,893888책으로 되어 있는 오래되고 방대한 양의 역사서이다.

유네스코 등재 유산 소개에 따르면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정치, 외교, 군사, 제도, 법률, 경제, 산업, 교통, 통신, 사회, 풍속, 미술, 공예, 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어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없는 귀중한 역사 기록물이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은 그 역사기술에 있어 매우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은 역사기록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조선왕조실록의 기초자료 작성에서 실제 편술까지의 편수 간행작업을 직접하였던 사관은 관직으로서의 독립성과 기술에 대한 비밀성을 제도적으로 보장받았다. 실록의 편찬은 다음 국왕 즉위한 후 실록청을 개설하고 관계관을 배치하여 편찬하였으며 사초는 군주라 해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도록 비밀을 보장함으로써 이 실록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확보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정족산본 1,181, 태백산본 848, 오대산본 27, 기타 산엽본 21책을 포함해서 총 2,077책이 1973년 국보로 지정되었고, 1997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후 오대산 사고본은 2006년 서울대학교로 반환된 47책과 2018년 일본에서 매입한 1책이 국보로 추가 지정되었으며 현재 오대산 사고본 75책은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후 조선왕조실록과 안성시지(201111)><안성 향토사료집(안성문화원. 20036)>, <홍계남 장군 고루비 안내판>, <편역 안성기략(2008)> 등을 통해 홍계남 장군과 이덕남 장군 기록을 살펴볼 예정이다.

최용진 기자 news660@naver.com

 

자치안성신문 (news660@naver.com)

  • 등록된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댓글0

스팸방지코드
0/500
등록된 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