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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계남 ‘이몽학 난’ 연루됐지만, 선조 임금 “불문에 부칠 것을 명”했다

​​​​​​​이몽학 난은 누적된 서얼 차별과 핍박받던 민중이 결합한 반란이었다
안성 의병장 이덕남, 홍계남 의병장(義兵將)을 기억하자 ⑧

기사입력 2025-08-23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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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 30권(1596년 선조 29년 7월 1일. 1번째 기사)명

 


선조수정실록 30권(1596년 선조 29년 7월 1일. 3번째 기사)

임진왜란 당시 안성 의병장 이덕남 장군과 홍계남 장군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앞서 언급했지만, 의병(義兵)은 사전적 의미로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하여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군대. 또는 그 군대의 병사.”를 일컫는 말이다.

국가가 정규군인 관군(官軍)을 통해 공식적으로 주권자인 국민(백성)의 안녕을 지켜주지 못하는 무능함이 발생했을 때 민중이 외적의 약탈과 생존 위협에 저항해 국가공동체와 지역사회 붕괴를 지켜낸다는 의()를 위해 자발적으로 만든 백성(국민)이자 주권자의 군대 또는 병사가 의병(義兵) 또는 의병대(민병대)였고, 그들 의병을 이끌던 장수(將帥)가 의병장(義兵將)이었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침략한 왜군에 맞서 국가인 조선과 그 구성원인 백성(민중)을 지켜야 할 조선왕조의 지배계층인 왕과 관료(신하) 그리고 정규군인 관군은 제구실을 못 하고 속수무책으로 연전연패하며 의주로 피난 가기에 바빴다.

그런 가운데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에 맞서 싸우며 버텼고, 왕인 선조와 신하들은 그들 의병장에게 관직을 내려 제도권인 정규군으로 편입시키는 것이 사실상 전부였다.

그 과정에서 서얼(庶孼) 출신인 홍계남 장군이 관직을 받게 됐고, 특히 임진왜란에서 홍장군의 활약은 선조 이후 영조와 고종 때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서얼 차별 철폐(서얼통청운동)의 논의로 이어지기도 했었다.

결국 서얼(庶孼)에 대한 기득권 관료의 벽을 허물진 못했지만, 특히 앞서 얘기했던 영조와 고종 때 집단 상소 등에 따라 왕과 신하가 찬반 논의를 한 것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서얼 차별 철폐의 논거인 서얼(庶孼) 출신 인물에 의병장 홍계남 장군이 있었고, 임금인 선조가 어머니와 가족을 직접 챙겨야 할 정도의 위상이 높았다는 것을 지난 호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국가인 조선왕조와 당시 지배계층인 왕과 신하 그리고 정규군인 관군이 하지 못했던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 싸워 조선을 누란의 위기에서 구해냈지만, 여전히 서장에 대한 차별이 존재했고, 관직도 한계가 있었다.


국가인 조선이 제대로 돌보지 않아 백성이 일으킨 반란


그런 와중에 조선왕조실록 등에는 역모(逆謀) 또는 반란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서얼 출신의 계급적 한계로 인한 불만 그리고 제구실을 못 했던 국가인 조선왕조와 지배계층에 대한 민중의 불만, 특히 1592년 임란(壬亂) 이후 계속되는 흉년에 견디지 못한 농민이 동조하는 이른바 이몽학의 난1597년 정유재란을 1년 앞두고 1596년 발생했다.

<임진왜란 이후 흉년이 계속되다가 선조 28(1595) 풍년으로 아사(餓死) 상태에 있던 민중을 구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의 수혜는 지배계층 수탈의 소지를 제공하였다. 당시 중앙정부는 강화를 둘러싸고 남인·북인·서인의 3파전이 치열하였으며 일본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하여 각처에서 산성을 수축하는 등 민중의 부담이 가중하여 민중의 원망과 괴로움은 현실 여건과 타협할 수 없는 사회모순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러한 불안한 기회를 이용하여 반란을 획책한 것이 이몽학이었다.>(국사편찬위원회. 신판 한국사)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킬 즈음에 민중의 동태를 조경남은 이 때에 인민들은 난리를 겪어 곤핍한 데도 백방으로 침탈을 당하여 한번 속여서 미혹시키는 말을 듣고 따르는 자가 몰려와서 며칠이 채 안되서 1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운집한 군중들은 당연히 중앙정부를 전복하려는 반란 세력에 호응하게 되었다. 농민들은 마음이 끌려 그들이 지나가면 논밭에서 김을 매다 호미를 들고 환성을 올렸다고 하며, 행상들은 몽둥이를 들고 즐겨 날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국사편찬위원회. 신판 한국사)

여기서 이몽학의 난의 정점에 있던 이몽학은 왕족 서얼 출신의 상대적으로 차별받는 인물이었고, 그를 따르는 한현, 권인룡, 김시약 등도 서얼 출신 인물로 계급적 한계로 인하여 당시 국가인 조선 사회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선조수정실록 30(1596년 선조 29711번째 기사) ‘충청도 홍산의 서인 이몽학이 군사를 모아 난을 일으키다는 제목의 기사에서도 < (중략) 몽학은 그들에게 속임수로 꾀기를 이번에 일으킨 의거는 백성을 편안히 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일이다. 거역하는 자는 죽음을 당할 것이고 순종하는 자는 상을 받으리라고 하니 모두들 좋다고 떠들면서 그를 따랐으며, 사람마다 스스로 고관대작이 될 것으로 여기고 성불(聖佛)이 세상에 나왔다고 하였다>는 대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이 국가(왕조)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긴 흉년 끝에 풍년이 찾아왔지만, 민중이 구제된 것이 아니라 지배계층의 수탈로 이어지는 사회모순이 심화(深化)로 백성(민중)이 편안하지 않았고, 불안정한 시기였다는 것이다.


선조실록과 난중잡록 등 이몽학 난에 홍계남 등장


그 이몽학의 난과 관련해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과 신편 한국사에 홍계남 장군이 등장한다.

선조수정실록 30(1596년 선조 29711번째 기사) ‘충청도 홍산의 서인 이몽학이 군사를 모아 난을 일으키다는 제목의 기사 말미(末尾)<(중략) 잇따라 청양(靑陽정산(定山) 6개 고을을 함락시켰다. 수령들은 모두 먼저 도망치고 아전과 백성들은 적들의 호령에 따랐고 술과 음식을 차려서 맞이하였으며 군사를 뽑아 그들에게 가세하였다. 이에 소문만 듣고도 호미를 던지고 그들에게 투항하는 자가 줄을 이어 군사가 수만 명에 달하자 소문을 퍼뜨리기를 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과 의병장 곽재우(郭再祐홍계남(洪季男) 등이 모두 군대를 연합하여 도우며, 병조 판서 이덕형(李德馨)이 내응한다.’ 하니, 중외(中外)가 놀라 민심이 술렁거렸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선조수정실록 30, 선조 29(1596) 713번째 기사 역적 이몽학의 모주 한현을 잡아 홍주에 이감하다에서는 <(중량)한현은 기미를 미리 알고 몰래 면천(沔川)으로 도망쳤다가 면천 군수 이원(李瑗)에게 잡혀서 옥에 갇혔던 것이다. 적이 패해 도망친 후에 한현을 홍주로 이감하고 국문하여 승복을 받았다. 그는 자백에서 많은 무리들을 끌어들였는데 당시의 명장 김덕령·곽재우·고언백·홍계남 등이 연루되었다. 상은 모두 불문에 부칠 것을 명하고 김덕령만을 잡아 올 것을 명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에는 <이리하여 반란 주도자의 처리는 일단락되었으나 반란 주모자의 수견문서(搜見文書)나 심문 과정에서 의병장들의 이름이 오르내려 조야에 큰 충격을 주었다. 즉 이몽학을 복주할 때 그의 문서 속에 김··홍씨 성이 발견되었고, 한현은 결박당한 뒤 도원수가 묻는 말에 김덕령·최담령·홍계남이 공모했고 또 곽재우·고언백은 모두 나의 심복이라고 대답했다.(난중잡록) 이로 인하여 이들은 각기 서울로 붙잡혀 와서 곤혹을 치렀으나 대부분 왕이 다 죄를 묻지 않겠다하여 풀려났다. 그러나 김덕령과 최담령은 끝내 석방되지 못하고 옥에 갇혀 추국을 받았다. 김덕령은 옥에 갇힌 지 20여 일간 6차의 국문을 받다가 승복하지 않고 마침내 장살(杖殺)당했다. 얼마 후 최담령도 수차 국문을 당하고 불복하다가 옥사했다. 김덕령에 대해서는 후대에 신원되어 모든 죄상이 벗겨지고 승계(陞階)하여 추시(追諡)까지 받았으나 지나친 반민의 색출은 민가에 많은 피해를 주었다>고 나온다. (다음 호 계속)

최용진 기자 news660@naver.com

 

자치안성신문 (news6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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