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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예총 이사장 된 ‘류연복’ 안성 보개면 남풍리 하남마을 이장

안성은 민중예술의 거목이자 민중미술 전설과 이웃으로 함께 사는 곳이 됐다

기사입력 2026-06-20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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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연복 보개면 남풍리 하남마을 이장/한국민예총 이사장.

415일 보개면 남풍리 하남마을 류연복 이장을 찾았었다.

323일 대한민국의 진보적 예술인, 예술단체 연합체인 사단법인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이하 한국민예총) 이사장으로 선출됐다는 소식을 듣고서다.

류연복 이사장은 1993년 고삼면 쌍지리 마을회관 앞 무당집으로 이사 와 안성과 인연을 맺고 3년 뒤 지금의 보개면 남풍리 하남마을 산제사를 지내던 국사봉 골짜기로 자리를 옮겨 안성에서 33년째 같이 살며 연복이 형’, ‘류 이장’, ‘류 이장님’, ‘류 화백등으로 불리는 이웃이다.

시골 마을의 경우 흔한 말로 텃세가 심해, 이사를 와 수십 년을 한 동네 같이 살아도 외지인 취급한다지만, 어느새 함께 사는 이웃으로 스며든 그는 마을 대표인 이장을 하며 대한민국 진보 예술인, 예술단체 연합체인 한국민예총 이사장까지 맡게 됐다.

안성에 자리 잡은 지 “29년 만에 주민 됐다 야~”라는 농담을 듣기도 했다던 류연복 이장. 안성에 이사 온 지 33, 보개면 남풍리 이장 4년 차에 1988년 한국민예총 창립 당시 한국민족미술인협회 사무국장으로 참여 후 38년 만에 이사장까지 된 것이다.

이장을 하며 한국민예총 이사장까지 하게 된 안성시민이자 보개면 남풍리 하나마을 류연복 주민의 저력(底力)은 무엇일까?

대중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예술이 민중이다

류연복 이사장은 1958년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에서 태어나 여섯 살 되던 해 산림공무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서 승덕초등학교- 영훈중학교, 신일고등학교 거쳐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한 사실상 서울내기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1977년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입학 후 그는 적십자회 야학교사로 노동 소년을 가르치며 사회와 인간의 양심에 대해 고민을 했었고, 197910.16이 터지기 5개월 전 군에 입대해 10.26518 때 계엄군으로 서울에 투입되는 등 역사의 한복판에 있다가 1981년 제대 후 1984년 졸업했다.

대학 시절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빠지기도 했지만, 몇 사람만 알아보는 그림이 아닌 예술의 아름다움을 대중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방향을 잡고, 1983현대미술연구소를 꾸리고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하며 우리 미술의 나갈 방향과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역사 관계 자료를 수집하다가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이후 기존의 민중미술가들처럼 미술동인 실천’, 목판화모임 나무그리고 억새’, ‘표상등 소집단과 함께 서울미술공동체준비 발족을 위해 만든 시판화 달력에 그의 판화작품 <갑오농민전쟁>이 실리기도 했다.

그렇게 19842월 결성이 공표된 <서울미술공동체>는 소집단 중심의 미술운동을 넘어선 최초의 청년 미술인 대중 조직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류연복 작가는 당시 주무로 활동했다.

<서울미술공동체>, <두렁> 등 당시 민중미술 동인들은 민중, 대중과 쉽게 소통하고 당시 민중의 시대 정신이었던 민주화의 현장에서 민중과 함께했고, 이는 류연복 작가가 고민했던 미술에 대한 방향이 판화, 만화, 걸개그림, 벽화 등으로 구현되던 시기였다.

류연복 참여했던 정릉 벽화 사건은 민중 미술사 큰 전기

벽화 상생도의 파괴 과정(출처 - 민주화운동사업회 오픈아카이브).

그러다 잘 알려진 1986년 유명한 정릉동 벽화 탄압 사건이 발생했다.

류연복 이사장이 정릉동 자신의 집 담벼락에 최병수, 김연만 등 5명의 작가와 그린 벽화로 인해 경찰에 연행되고 파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자료를 검색하다 <벽화 상생도의 파괴 과정>이라는 민주화운동사업회 오픈아카이브에서 벽화가 파괴는 과정과 사진기록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기록 중 전체 설명에는 작가 5명에 의하여 허름하고 볼품없던, 벽이 중앙 부분에 태극 무늬와 꽃으로 둘러싸인 속에서 한복의 두 남녀가 어울려 춤을 왼쪽에는 냇가에서 물놀이하는 두 어린이와 밭에서 일하다 나무 그늘에서 쉬는 오른쪽에는 아버지의 무등을 ()는 어린이, 즐겁게 뛰노는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어깨동무하고 기쁨을 나누고 있다라며 전통적 민화기법과 십장생의 재를 배경으로 건강하고 아름답게 사는 사람들을 그린 살아있는 벽화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823시경 벽화를 파괴하려고 동원된 30여 명의 구청 직원이 수성 페이트를 들고 항의하는 작가들과 대치하고 있다라는 사진과 설명.

의 호위 상태에서 구청직원들이 완전히 파괴하고 있다라는 사진과 설명.

완벽히 파괴된 벽화를 경찰, 전경, 구청직원 철수 후 물을 뿌려 지워내며 복구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라는 사진과 설명.

“83일 일요일 아침 기습적으로 경찰, 전경, 구청 구청직원들이 작가 유연복 등 6명을 강제 연행하는 장면사진과 설명.

경찰, 전경의 호위하에 구청직원들이 전날 복구한 벽화를 다시 파괴하는 장면이라는 사진과 설명.

구청 직원들과 야만적인 작태로 벽화를 유성페인트로 재복구할 수 없도록 파괴하고 있다라는 사진과 설명.

정리하면 1986년 류연복 작가가 자신의 정릉 집 담벼락에 동료 작가 4명과 <상생도>라는 벽화를 그려 놓은 것을, 821차로 구청 직원 30여 명이 수성페인트로 파괴하고 이를 복구해 놓자, 다음날인 83일 경찰, 전경, 구청 직원들이 작가 유연복 등 6명을 강제 연행하고, 상생도를 유성페인트로 파괴했다는 기록이다.

당시 유연복 작가 등 5명이 벽화로 그린 상생도는 시골 마을의 꽃 속에서 춤추는 남녀, 냇가에서 물놀이하는 아이, 고된 농촌 일하다가 쉬는 어른들, 아버지 목말(무등) 즐기는 아이, 즐겁게 뛰노는 아이들과 어깨동무하고 기쁨을 나누는 청소년들 등 어찌 보면, 평화로운 시골 마을공동체 구성원이 함께 어우러져 풍경을 그린 것이었다.

그런데 이를 공권력이 동원돼 파괴하고 심지어 작가들을 연행까지 한 사건으로 민중 미술계의 저항과 결집의 계기뿐만 아니라 류연복 작가가 벽이 확보되기 전에는 벽화의 실현이 힘들다는 판단, 이동 벽화로서 걸개그림에 주목하고 걸개그림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게 했다.

실제 군부독재에 항거한 5.3인천민주항쟁에 걸개그림 3개를 가져가기도 하는 등 기존 판화, 벽화 등에서 걸개그림을 통해 시대정신과 민중성을 담아가게 된다.

안성은 본격적인 예술인으로 삶과 성취를 이룬 곳

그리고 류연복 작가와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1987년 민족미술협의회 총무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며 1988년 국민주주 방식으로 창간한 한겨레신문이 창간되며 1995년까지 사용했던 신문 제호의 바탕 그림인 백두산 천지판화를 제작한 미술인이 류연복 작가였다.

또한 시민 소액 주주로 1995년부터 본지 창간 준비호 발행부터 2002년까지 사용했던 제호 자치안성글씨를 써 준 작가이기도 했다.

1980년대를 민중과 민중미술 속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작가는 1900년대로 넘어오며 사회가 어느 정도 민주화되자 다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며 내려온 곳이 안성이다.

그에게 안성은 회화과를 졸업하고 민중미술의 한 분야였던 판화, 벽화, 걸개그림 등을 통한 치열했던 활동에서 판화로 본격적인 예술가로 삶과 성취를 이룬 곳이 안성이란다.

그러나 그의 예술가로서 그의 삶은 민중과 떨어진 것이 아니고, 여전히 딛고 선 땅인 안성에서도 민중과 호흡하며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

처음 내려와 당시 한창 농민 등 민중들이 주도로 추진됐던 전국 최초 의료생협인 안성의료생활협동조합 기금 마련을 위한 전시회도 하고, 이상 조직기획위원장 등의 역할도 했다.

또한 안성의 대표적인 환경단체인 안성천살리기시민모임 창립에도 힘을 보탰고, 공동대표를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며 블랙리스트 작가로 탄압도 받았던 그는, 여전히 민중과 함께 광화문 광장 등 아스팔트에 서서 시대 정신을 외면하지 않는 민중 예술인이자 함께 안성 사는 따듯한 이웃이었다.

류연복 이장을 이사장으로 선출한 한국민예총은 1988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창립선언문에서 지난 백여 년 동안 우리 민족은 민족해방투쟁이라는 위대한 근대사적 과업을 수행하여 왔으며, 우리는 길고 긴 식민지의 어둠과 압박의 시대를 지나 그보다 더욱 긴 세월을 외세에 의한 민족분단의 현대사 속에서 보내왔다. 이러한 길고 어려운 고난의 시대를 거치면서 언제나 싸움의 선봉에 섰던 사람들은 바로 이 땅의 이름 없는 민중이었으며 그들은 대지처럼 묵묵히 강물처럼 도도하게 우리 역사의 주체로서 살아왔다라고 민중을 규정했다.

그리고 민족미술이 나아갈 길은 민족의 자주적이며 민주적인 삶을 실현하는, 그리고 그 역량에 기초하는 현실주의 미술의 실현이라며 민족 민중 예술운동에 있어서의 미술운동은 전문예술가의 기량과 유산을 민중의 입장에 서서 비판적으로 계승 발전시키는 것과 민중의 생활과 문화적 향상을 위하여 미술의 대중적 보급과 대중의 자주적 미술역량의 발전을 돕는 양면성을 상호, 침투시키면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안성은 대한민국 민중예술의 거목이자 민중미술의 살아있는 신화인 류연복 안성시 보개면 남풍리 하나마을 이장을 이웃으로 함께 사는 곳이 된 것이다.



 
 


최용진 기자 news660@naver.com



자치안성신문 (news6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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