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 수 전 오산대학교 교수/안성반도체포럼 회장
[기고] 안성은 국가로부터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특화단지로 지정받아 동신일반산업단지를 중심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오랫동안 농축산업과 중소 제조업이 지역경제의 큰 축을 이뤄온 안성으로서는 산업구조를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다. 다만 특화단지 지정은 출발선이지 결승선이 아니다. 산업단지는 기업이 활동할 공간을 마련해 줄 뿐, 기술과 인력, 자본과 주문을 저절로 불러오지는 않는다. 어떤 기업을 담고, 어떤 기술을 키우며, 어디에서 매출을 만들 것인지가 성패를 가른다.
최근 국가 반도체 전략도 달라지고 있다. 용인·평택·이천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 생산축을 유지하면서 충청권에는 첨단 패키징과 연구개발, 호남권에는 새로운 생산거점, 영남권에는 소재·부품·장비와 제조 기반을 강화하는 전국적 분업구조가 뚜렷해지고 있다. 이 변화 앞에서 안성은 지나치게 안심해서도, 반대로 기업이 모두 떠날 것처럼 과민하게 반응해서도 안 된다.
국가 반도체 지도, 위기와 기회를 함께 보자
기업은 행정구역보다 고객과 시장을 따라 움직인다. 새로운 생산공장이 조성되면 장비업체와 부품업체가 고객 가까이에 서비스센터나 물류거점을 두려 할 수 있다. 비수도권의 보조금, 세제 혜택, 저렴한 부지도 기업의 선택에 영향을 준다. 일부 생산시설이나 인력이 다른 지역으로 옮겨갈 가능성을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다.
그러나 새로운 반도체 생산거점은 안성기업의 시장이 넓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공장이 늘면 장비, 정밀부품, 세정·코팅, 검사·계측, 유지보수와 공정서비스 등의 수요도 함께 늘어난다. 호남권이나 충청권을 경쟁지역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안성기업이 진입해야 할 새 시장으로 보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공장이 어디에 들어서느냐가 아니라, 그 공장에 안성에서 만든 장비와 부품이 들어가느냐는 것이다.
대형 팹보다 장비·부품에 승부를 걸어야
안성이 용인이나 평택과 같은 대규모 생산도시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대형 팹은 막대한 전력과 용수, 넓은 부지와 장기간의 투자를 요구한다. 이미 국가 차원의 생산거점이 추진되는 상황에서 안성이 같은 방식의 유치 경쟁에 뛰어들면 비용은 커지고 차별성은 약해질 수 있다.
안성에는 이미 반도체 장비 중심의 소부장 특화단지라는 분명한 역할이 주어져 있다. 이 강점을 더 좁고 깊게 다듬어야 한다. 정밀 세정과 연마, 특수코팅, 고기능 세라믹, 검사·계측, 장비 핵심모듈, 유지보수와 재제조, 공정자동화와 제어기술 가운데 기존 기업과 연계할 수 있는 분야를 골라 집중해야 한다. 여기에 장비 제어 소프트웨어, 공정데이터 분석, 고장 예측 기술을 결합하면 전통 제조업과 첨단기술이 만나는 안성만의 산업구조를 만들 수 있다.
반도체라는 이름만 붙으면 모두 받아들이는 백화점식 산업단지는 피해야 한다. 메모리, 파운드리, 팹리스, 패키징, 소재, 장비를 한꺼번에 내세우면 정작 안성의 전문성이 흐려진다. 안성의 목표는 막연한 “반도체 도시”가 아니라 다른 지역이 쉽게 대신할 수 없는 “반도체 장비·부품 전문도시”여야 한다.
산업단지는 그릇, 무엇을 담느냐가 더 중요하다
기업이 공장을 짓는 데는 땅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전력과 공업용수, 도로와 물류망, 폐수·폐기물 처리시설, 화학물질과 특수가스 안전관리, 예측이 가능한 인허가 일정이 함께 갖춰져야 한다. 기업은 선언보다 날짜를 본다. 언제 착공할 수 있고, 전력은 언제 들어오며, 공장 가동은 언제 가능한지가 불분명하면 다른 지역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산업용지 분양도 속도만 앞세워서는 안 된다. 기술력과 연구개발 투자, 반도체 관련 매출, 고객사 확보 가능성, 고용의 질, 지역기업과의 협력계획을 살펴 입주기업을 골라야 한다. 앵커기업 한두 곳만으로는 생태계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정밀가공, 세정, 코팅, 센서, 제어장치, 소프트웨어, 물류와 유지보수 기업이 함께 들어와 기술개발과 생산, 수리와 서비스가 이어지는 구조가 필요하다.
안성 반도체산업의 첫 과제는 산업단지를 얼마나 크게 만드느냐가 아니다. 어떤 기업과 기술을 담아 전국의 생산거점에 공급할 수 있는가를 정하는 일이다. 다음 과제는 그 기술을 실제 양산인증과 주문서로 연결하고, 기업과 사람이 안성에 머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다음 호에 계속)
채 수 전 오산대학교 교수/안성반도체포럼 회장